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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6 <열하광인-백탑파 그 세번째 이야기>를 읽고

<열하광인-백탑파 그 세번째 이야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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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일단 소설은 재미있어야 할 것 같다. 이 책 정말 재미있다. 100북스클럽 선정도서 중에서 한번에 쭉 다 읽은 것은 이 책 밖에 없는 것 같다. 역사 사실 속에 가공인물과 연쇄살인에 대한 미스테리를 읽어 가다보면 어느새 책장 넘기기가 아쉬워지는 분량으로 남아 있다.

최근에 생각해 보면 조선사에서 정조시대가 나에게는 많이 다가오는 것 같다. 그것은 고미숙 박사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과 최근에 읽은 김탁환 교수의 <열하광인>과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의 <무예도보통지> 그리고 100북스클럽 선정도서였던 저자 이덕일의<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읽은 것도 있지만 TV를 보더라도 “정조 암살 미스테리 8일”이라는 것이 소개된다. 왜 나에게 정조시대가 자꾸 부각되는 것일까? 작가들에게는 소재가 많은 시대였는지도 모르겠다.

정조시대는 할아버지 영조시대부터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그 여파의 하나로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굶어 죽었다. 이런 끊이지 않는 당쟁속에서 청나라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들어왔기에 공맹사상에서 벗어나서도 안되고 그것을 숭배하여야 하는 조선이 새로운 사상에 움틀거리며 깨어나는 시대적 역동기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중심에 연암 박지원이 있었고 그의 저서 <열하일기>가 이었다. 어느 시대건 시대적으로 큰 역사적 사건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은 기득권층과 피기득권층의 싸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건중에서도 특히 이데올로기나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기득권자들에게는 그것이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열하일기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산수화를 그리려면 우리나라 산수화를 그려야지 왜 중국의 산수화를 모방해야 했던 것일까? 열하일기는 더러운 것은 더럽다 말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는 것을 다음 인용으로 알 수 있다.

‘각 사물의 이름 또한 대국에서 빌려 온 것이 많으니 그쪽에서는 귤인 것이 우리에게는 탱자에 불과할 수도 있음이외다. 그 전거를 상세히 밝히지 못하고 또 더러는 어색한 부분도 없지 않아 문장에 대한 믿음을 떨어뜨립니다.’

‘더러운 것은 더럽다 해야 하고 추한 것은 추하다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피한다면 어찌 세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서시가 예쁘다고 하여 매일 서시처럼 얼굴을 찡그릴 수 만은 없소이다. 진짜 자신만의 문장을 찾았으면 좋겠소이다.’

아주 내 성미에 맞는 내용들이다. 각색된 내용이 아닌 열하일기 내용 전체를 다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몇권 읽지 않은 책에서 정조에 대한 느낌은 노론과 소론의 당쟁속에서 정권을 쥐고 있었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노론파 사람들 속에서 정치를 해야 했기에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그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또는 자신의 말을 잘 따르도록 하기위해서라도 그리고 사회 변혁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젊은 학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는 진보적인 성향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탕평책을 사용하여 위민정치를 폈으며 서얼출신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 인사를 하여 당파싸움을 없애려는 노력도 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속에서 정조와 백탑파 서생들의 대립관계 그리고 기득권 세력들의 암투를 허구와 개연성으로 내용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짧은 역사 지식 때문일까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역사적 사실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주인공으로는 이명방, 명은주, 김진 정도가 가공인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왜냐하면 처음 들어보기 때문이다. 하하하(무식이 한입니다. ㅠㅠ). 백탑파 서생들은 서얼출신도 많았지만 각자의 걸출한 능력으로 한 때는 정조의 신임을 얻어 조선을 새롭게 개혁하려는 노력도 하지만 소설속에서는 정조로서는 어쩔수 없는 세태 때문에 버림을 받게 된다. 백탑파 서생들 중에는 규장각에서 일하는 서생들이 많았는데 책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강했으며 기득권의 신념을 타파하려고 한다. 그들은 나라의 금서인 열하일기를 읽었고 스스로를 열하광인(熱河狂人)이라고 불렀으며 그들의 모임은 열하광(熱河狂)이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100북스클럽과 그 회원들이 떠올랐다. 100북스클럽은 열린공간이다. 열린공간이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며 ‘학습독서’는 새로운 지식과 시도를 탐구하는데 있어 그것을 배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18세기의 백탑파가 있었고 100북스클럽은 21세기의 백탑파인 것이다.

‘<열하>를 읽는 모임을 갖자고 이덕무에게 청했을 때, 그는 빙긋 웃으며 노루 꼬리만큼 짧게 물었다. “제대로 미쳐보려고?” 열하광에 참여한 이들은 내남없이 <열하>에 미친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이 대목에서도 최근 우리 100북스클럽의 소모임을 만들기 위해 추진중인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머릿속에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 100북스클럽도 제대로 미쳐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ㅋㅋㅋ’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또 다른 생각 하나는 소설속에는 사건의 나열이 현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 시대적 상황속에 내가 들어가야 하는데 우둔하다 보니 역사 교과서 같은 것을 보게되더라도 현재에서 그 시대적 사건의 나열만을 단지 외우기가 쉬웠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가적인 견해로 과거의 사건을 현실로 다가올 수 있도록 재구성되었다. 18세기 정조의 말이 마치 내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재 일어나는 사건처럼 느낄 수가 있다. 이 말은 시대적 상황속에 내가 자연스레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왜 그 사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관점을 둔 것중에 한가지는 소설을 어떻게 쓰는 것일까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까? 어떻게 이런 대화 내용을 만들 수 있을까? 어려운 고어체들도 어떻게 이렇게 다양하고 해박할 수 있을까? 등등등 이런 생각들이 떠 올랐다. 정답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대충은 알 듯도 했다. 그것은 참고문헌을 보고 알았다. 엄청난 참고 문헌이 있었다. 정조시대를 알려면 하편 뒤에 열거된 문헌들은 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 가야할 길이 멀고 갈 수 있을지란 생각도 들고... 뭘 말하고 싶은것지 모른채 알지도 못하는 내용들 주저리 주저리 말한 것 같아 심히 부끄럽다. 괜히 ‘이주일에 한편씩 독후감 쓴다고 말했구나’는 생각도 든다. 쓰고 싶었던 내용에 대한 느낌도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쓰다 보니 이렇게 되었구나.


어쩔 수 없이 독후감 같지도 않은 독후감 공표한 뒤로 첫번째 독후감으로 올립니다. 하하하(그는 호탕하게 웃었지만 왠지모를 비통함이 배어 있었다.)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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