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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8.06 지행에 대한 고민
모든 것은 '행(行)'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
행(行)은 경험이다.
경험은 지식이 된다.
지식은 다시 행(行)을 낳는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경험에 의해 구성되어진 지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거나 배타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적인 현상의 예를 들어보자면 같은 종교안에서도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싸우며 또한 나라끼리는 자국의 이익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전쟁도 불사하지 않던가! 인간은 서로 싸우며 진보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멸해 가는 것인가? 서로 이해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가? 지구상의 모든 개인이 악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과연 행복해 질것인가? 과연 모든 사람이 의도적인 악함을 버리고 살 수 있겠는가? 그러면 세상은 타인을 위해 죽지 않아도 되는 상황은 없어질 것인가? (사회의 부조리는 없어지고 따뜻한 정(情)이 있는 사회는 이룩될 수 있겠는가?)
차이는 생길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뇌는 그렇게 차이를 만들 수 밖에 없게금 되어 있다고 요로다케시는 <유뇌론>이나 <바보의 벽>에서 말한다. 결국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며 자기만의 생각이 옳다는 것은 오만이다.
그러나 정도의 문제에 따른 차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적당한 예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같은 길을 가고 같은 꿈을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먼저 가본 사람은 뒤늦게 출발한 사람에게 그 길은 막힌 길이라고 충심으로 조언해 주었을 때, 늦게 출발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계속가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출발한 사람이 착각한 것이라면 그 때는 또한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출발한 사람의 능력의 한계로 막힌 길이었지만 늦게 출발한 사람에게는 그 막힘은 가벼히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또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말 장난인가? 결국 자연과학의 결론으로 도출된 선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지만 자연과학도 정해져 있는 답이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빛이 입자설과 파동설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 빛은 상황에 따라 두가지 설에 맞는 성질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하여 화가 나는가? 그것은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가? 그 이기적인 욕심은 세상(타인)을 자기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왜 자기화하려 하는가? 나의 선택과 생각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인지적 구조에서 해석되어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잘 해보자고 옳바른 선택을 하게 하려고 도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타인을 알 수 없는데 내 주장만 옳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오만이다. 타인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려 노력해 보는 것일 뿐! 100% 타인의 시각으로 바라 본다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순리란 무엇인가? 자연의 이치일까!
그렇다면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까?
과연 자연(인간을 포함한)은 안정한 상태로 귀결하는 것일까? 아니면 불안정 상태로 귀결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행하는 것이 옳바른 것일까?
행이라는 실천은 의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읽기, 운동하기, 약속지키기, 만나기, 대화하기 등등 위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면 숨쉬기와는 구별되는 것이 있다. 숨쉬기가 생명유지에 관계되어 자동으로 작용되는 것에 비해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쉬기도 편히 쉰다는 전제하에 깊게 쉬고 천천히 쉬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것을 배우면(알게 되면) 의식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숨을 쉬게 된다. 결국 알아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읽기를 하면 좋다. 왜 좋은가? 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어 좋다. 일상에서 운동하고 대화하고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은 대화하기에 전문적이다. 특정분야에 몰두하여 연구한 사람의 글(생각)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생각을 포함하고 있고 확장, 확대되어 있으며 독서라는 것은 저자와의 대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내 사고의 틀이 깨짐을 느끼고(인지적 불균형) 안내에 따라 사고의 깊이를 경험하게 될 때의 그 희열! 책의 내용을 학습하여 지식으로 습득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희열의 감동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 만족은 책을 읽어야지만(行하여야 지만) 알 수 있는 것이며 그 만족감을 알아가는 것도 지식 구성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이해(오해일 수도 있지만)다.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했기에 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삶의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지 않겠는가!
운동을 하면 좋다. 왜 좋은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동작을 알수 있고, 반복적인 연습을 통하여 이전에 하지 못했던 동작을 해냈을 때의 그 쾌감! 더불어 적당한 운동은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 역으로 운동부족으로 자신의 몸이 파괴되어 가는 보고있다면(안다면) 운동은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다는 것! 그 때의 희열을 여기서도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약속을 지키는 것은 왜 좋은가? 믿음을 통한 감동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행(行)해 질 때 학습이 되어 지식으로 구성되어 질 수 있으며 스스로 의미화 할 수 있다. 즉, 마투라나의 말처럼 “무릇 앎은 함이며 함은 앎”인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좋은 것은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는데 어떻게 행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하지만 부정적으로 작용되는 결과도 분명있다. 그것은 부정적인 행에 의한 것이다. 속고만 살아온 사람은 속지 않기 위해 먼저 속여야만 하는 것이다. 어둡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두운 법이다. 예를 들면 여자에게 속은 남자에게는 여자는 믿지 못할 동물이며 남자에게 속은 여자는 남자가 믿지 못할 동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은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른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세상은 부정적인 면도 있는거야. 그런게 세상이야."
그러고 나선 세상을 덜 살았다느니 하며 어린(어리석은) 사람으로 쉽게 치부해 버린다. 자신 스스로가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인가? 모르는 것인가? 알고서도 이용하는 것인가? 난 모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그 어두운 그림자는 부메랑이 되어 그 자신에게
어떤식으로든 돌아올 것을 안다면 어찌 그리 행할 수 잇겠는가! 그렇다고 의심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심한다'는 말에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부정적으로만 한정지어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심한다'는 것은 '조심하자'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은 의심하도록 진화되어 왔을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여도 원시인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풀숲속에 무엇이 있는지 의심하고 예측하며 조심스럽게 활동하지 않았겠는가(경헙적(행)으로 알기에)!
자! 그러면 어떻게 행하며 살것인가?
태양이 있으면 분명 음지가 있듯이 음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정한 상태로 귀결되도록, 밝은 사회라고 믿는 쪽으로 행하여 하지 않을까?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다르기에 정의로운 사회라던지, 밝은 사회라던지에 대한 정의는 쉽게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회구조는 누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해지는 사람도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큰 악은 작은 선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고 큰 선은 작은 악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모 대기업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다. 중소기업을 죽이고 있지만 불우한 이웃을 돕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의 선택적 의무는 무엇인가?
물론 나 개인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서 살아가기에도 벅차지만 남의 어려운 일이나 애사를 모른척 할 수 없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즉, 우리는 우리인 것이다.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임은 분명하다. 영원히 만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무슨 생각인가 떠오르지 않았겠는가!) 결국 나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따르며 계속 행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 삶의 모토를 "세계정복" 에서 "세상을 바꾼다"로 바꾸지 않았는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영향력을 가장 펼칠 수 있는 적당한 직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전직을 준비중인 것이 나의 현 위치인 것이다.
그렇다! 나의 의무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도 이미 몇가지로 선택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행(行)은 경험이다.
경험은 지식이 된다.
지식은 다시 행(行)을 낳는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경험에 의해 구성되어진 지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거나 배타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적인 현상의 예를 들어보자면 같은 종교안에서도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싸우며 또한 나라끼리는 자국의 이익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전쟁도 불사하지 않던가! 인간은 서로 싸우며 진보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멸해 가는 것인가? 서로 이해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가? 지구상의 모든 개인이 악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과연 행복해 질것인가? 과연 모든 사람이 의도적인 악함을 버리고 살 수 있겠는가? 그러면 세상은 타인을 위해 죽지 않아도 되는 상황은 없어질 것인가? (사회의 부조리는 없어지고 따뜻한 정(情)이 있는 사회는 이룩될 수 있겠는가?)
차이는 생길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뇌는 그렇게 차이를 만들 수 밖에 없게금 되어 있다고 요로다케시는 <유뇌론>이나 <바보의 벽>에서 말한다. 결국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며 자기만의 생각이 옳다는 것은 오만이다.
그러나 정도의 문제에 따른 차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적당한 예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같은 길을 가고 같은 꿈을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먼저 가본 사람은 뒤늦게 출발한 사람에게 그 길은 막힌 길이라고 충심으로 조언해 주었을 때, 늦게 출발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계속가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출발한 사람이 착각한 것이라면 그 때는 또한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출발한 사람의 능력의 한계로 막힌 길이었지만 늦게 출발한 사람에게는 그 막힘은 가벼히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또 그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은 실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말 장난인가? 결국 자연과학의 결론으로 도출된 선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지만 자연과학도 정해져 있는 답이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빛이 입자설과 파동설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생각해 보라. 빛은 상황에 따라 두가지 설에 맞는 성질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하여 화가 나는가? 그것은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가? 그 이기적인 욕심은 세상(타인)을 자기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왜 자기화하려 하는가? 나의 선택과 생각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인지적 구조에서 해석되어 나온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은 잘 해보자고 옳바른 선택을 하게 하려고 도우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타인을 알 수 없는데 내 주장만 옳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오만이다. 타인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려 노력해 보는 것일 뿐! 100% 타인의 시각으로 바라 본다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순리란 무엇인가? 자연의 이치일까!
그렇다면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까?
과연 자연(인간을 포함한)은 안정한 상태로 귀결하는 것일까? 아니면 불안정 상태로 귀결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행하는 것이 옳바른 것일까?
행이라는 실천은 의지에 있다고 생각한다. 책읽기, 운동하기, 약속지키기, 만나기, 대화하기 등등 위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면 숨쉬기와는 구별되는 것이 있다. 숨쉬기가 생명유지에 관계되어 자동으로 작용되는 것에 비해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숨쉬기도 편히 쉰다는 전제하에 깊게 쉬고 천천히 쉬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것을 배우면(알게 되면) 의식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숨을 쉬게 된다. 결국 알아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읽기를 하면 좋다. 왜 좋은가? 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어 좋다. 일상에서 운동하고 대화하고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책은 대화하기에 전문적이다. 특정분야에 몰두하여 연구한 사람의 글(생각)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생각을 포함하고 있고 확장, 확대되어 있으며 독서라는 것은 저자와의 대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내 사고의 틀이 깨짐을 느끼고(인지적 불균형) 안내에 따라 사고의 깊이를 경험하게 될 때의 그 희열! 책의 내용을 학습하여 지식으로 습득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희열의 감동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 만족은 책을 읽어야지만(行하여야 지만) 알 수 있는 것이며 그 만족감을 알아가는 것도 지식 구성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이해(오해일 수도 있지만)다.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했기에 저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많은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삶의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지 않겠는가!
운동을 하면 좋다. 왜 좋은가?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동작을 알수 있고, 반복적인 연습을 통하여 이전에 하지 못했던 동작을 해냈을 때의 그 쾌감! 더불어 적당한 운동은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 역으로 운동부족으로 자신의 몸이 파괴되어 가는 보고있다면(안다면) 운동은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신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다는 것! 그 때의 희열을 여기서도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약속을 지키는 것은 왜 좋은가? 믿음을 통한 감동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행(行)해 질 때 학습이 되어 지식으로 구성되어 질 수 있으며 스스로 의미화 할 수 있다. 즉, 마투라나의 말처럼 “무릇 앎은 함이며 함은 앎”인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좋은 것은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는데 어떻게 행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하지만 부정적으로 작용되는 결과도 분명있다. 그것은 부정적인 행에 의한 것이다. 속고만 살아온 사람은 속지 않기 위해 먼저 속여야만 하는 것이다. 어둡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세상이 어두운 법이다. 예를 들면 여자에게 속은 남자에게는 여자는 믿지 못할 동물이며 남자에게 속은 여자는 남자가 믿지 못할 동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상은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른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에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게 전부가 아니야. 세상은 부정적인 면도 있는거야. 그런게 세상이야."
그러고 나선 세상을 덜 살았다느니 하며 어린(어리석은) 사람으로 쉽게 치부해 버린다. 자신 스스로가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인가? 모르는 것인가? 알고서도 이용하는 것인가? 난 모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언젠가 그 어두운 그림자는 부메랑이 되어 그 자신에게
어떤식으로든 돌아올 것을 안다면 어찌 그리 행할 수 잇겠는가! 그렇다고 의심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심한다'는 말에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부정적으로만 한정지어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심한다'는 것은 '조심하자'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아무래도 사람은 의심하도록 진화되어 왔을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여도 원시인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풀숲속에 무엇이 있는지 의심하고 예측하며 조심스럽게 활동하지 않았겠는가(경헙적(행)으로 알기에)!
자! 그러면 어떻게 행하며 살것인가?
태양이 있으면 분명 음지가 있듯이 음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안정한 상태로 귀결되도록, 밝은 사회라고 믿는 쪽으로 행하여 하지 않을까?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다르기에 정의로운 사회라던지, 밝은 사회라던지에 대한 정의는 쉽게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회구조는 누가 행복하면 누군가는 불행해지는 사람도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큰 악은 작은 선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고 큰 선은 작은 악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모 대기업의 예만 봐도 알 수 있다. 중소기업을 죽이고 있지만 불우한 이웃을 돕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의 선택적 의무는 무엇인가?
물론 나 개인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서 살아가기에도 벅차지만 남의 어려운 일이나 애사를 모른척 할 수 없으며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즉, 우리는 우리인 것이다.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임은 분명하다. 영원히 만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무슨 생각인가 떠오르지 않았겠는가!) 결국 나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따르며 계속 행하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 인생에 있어, 삶의 모토를 "세계정복" 에서 "세상을 바꾼다"로 바꾸지 않았는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영향력을 가장 펼칠 수 있는 적당한 직업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전직을 준비중인 것이 나의 현 위치인 것이다.
그렇다! 나의 의무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확실히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도 이미 몇가지로 선택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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