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생각'에 해당되는 글 60건
- 2010.05.17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하여
모든 지식은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관찰은 수동적으로 보는 행위와 다르다. 예리한 관찰자들은 모든 종류의 감각정보를 활용하며, 위대한 통찰은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 즉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잇는 매우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을 주시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주시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주의력을 집중시킬 수가 없다. 그래서 관찰은 생각의 한 형태이고, 생각은 관찰의 한 형태이다.
<생각의 탄생 중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보고 들어야 한다. 이 말은 주의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대상을 잘 관찰할 수가 있다. “잘-” 이라는 것에서는 방법을 제시해 주지는 않지만 방법이 있음을 내포한다. 방법이 있다는 것은 길이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길은 방향성(벡터)을 의미한다. 방향성이 없다면 에너지는 흩뿌려지고 말 것이다.
관찰은 학습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보고 듣는 행위를 통해서 모방하고 학습하기 때문이다.
보는 것만이 ‘관찰’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시신경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뇌에서 종합하여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상(부호화된 정보)으로 만들고 그것을 우리는 인식한다. 청각, 후각, 미각, 체감각등도 이런 방법으로 인식된다.
불교에서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해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과 대응되는 식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불교의 유식사상에서 언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식(識)에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등이 있다고 말한다.
안식은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것으로 색을 본다. 여기서 색은 물질을 말한다. 그리고 안식은 가장 먼 것을 확인하여 인식할 수 있지만 그만큼 혹하기 쉽다. 어두운 밤에 바닥에 떨어진 노끈을 뱀으로 보고(착각하고) 깜짝 놀랄 수 있는데 이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다른 지각기능보다 상당히 빠르고 즉각적이기 때문에 따로 증명할 필요가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이 생겨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오차가 많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식은 귀로 듣고 인식하는 것인데 소리를 듣는다. 나이가 들면 특히 고주파 영역은 잘 듣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인간의 가청 대역폭은 20-20,000Hz라고 한다. 귀는 10만분의 1의 차이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새로 나오는 영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맹인검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다.
한가지 감각으로 식작용이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감각을 사려 주의를 집중하고 관찰하고 느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듣고 느꼈다는 것은 그 물자체(thing in itself)를 느낀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 인식기관을 통해 인식된 것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시신경을 통해 들어온 정보가 뇌까지 전달되는 시간이 필요하고 다시 부호화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내가 느끼고 인식했다 하는 것은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을 봤다는 말과 같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는 어디일까? 내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책상은 나무로 만들어진 매끄러운 책상이다. 그러나 전자현미경으로 책상을 본다면 매끄러운 책상이 아니고 전자와 원자들의 모습으로 전자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고 그렇게 인식될 것이다. 어느 것이 본질인가?
비행기를 타고 로키 산맥을 내려다 보면 일직선으로 펼쳐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로키산맥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보이는 로키산맥 주변은 들죽날죽한 지형을 보게 될 것이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이렇듯 바뀔 수가 있는 것이 우리의 감각이다.
어쨌든 보고 듣는 등의 행위는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안이비설신의)은공유할 수 없는 감각패스(sense path)이다. 나의 감각은 내 몸안의 신경을 따라 나의 뇌로 출입한다. 보는 것에 대한 시간적 차이로 우리는 뇌가 만드는 허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 그 실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그 실체와 그 사건은 99.100%의 확률로 다시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을 유추를 통하여 확률적으로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엄밀히 말해서는 우리는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식작용을 통해 확률적으로 그것을 유추할 뿐이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고 할 뿐이지 100%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집중이 필요하고 관찰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공감을 위해서! 학습을 위해서!
잘 봐야지만 볼 수 있고 잘 들어야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하늘을 무의식적으로 보지만 하늘이 어떠냐고 물으면 대부분 못봤다고 말한다. 인식의 공백!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볼 때 하늘은 자신을 열어 보여주고 예술가가 만든 예술품은 자신의 탄생 배경과 특징을 말해준다. 주의 깊게 들을 때 음악을 통해 작곡가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음악은 단순히 소리의 나열에 불과하고 예술품은 의미없는 표현이자 형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찰할 때 see 할 것이 아니라 watch 해야 하고 hear 할 것이 아니라 listen 해야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