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생각'에 해당되는 글 60건
- 2008.08.06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 사춘기 소년의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나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존재할까?
어쨌든 적어도 나 하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났다.
혹시 내가 태어나야 했던 어떤 당위의 이유를 너무 오래되어 잊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태어남과 동시에 즉, 시ㆍ공간 속에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나는 의미가 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만남 속에서 내 의지의 작은 목표를 설정하면서 살아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태어난 이유와는 무관하게 자연과 인간이라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것이다.
행복 또한 각 개인의 즉, 나 자신의 의식속에서 어떤 충만감으로서 존재하는 느낌일 뿐은 아닐까? 살아가는 동안 행복하면 좋겠다는 말은 성립될 수 있겠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 났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 또한 내가 태어난 이유는 아니다. 개,돼지 등 동물들도 어미로 부터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 그 것 들을 본다면, 내 이런 생각은 전혀 쓸모 없는 것은 아닐까?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유기체로서는 같은 존재들 일테니까! (동물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이런 고민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장자나 플라톤은 무슨 생각으로 호접몽이니 이데아니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이 꿈인지? 꿈이 진짜인지?,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말했으므로)
난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고.
우리는 분명 어쩔수 없이 현세에 내던져 있고, 그 안에서 생로병사(또는 현실의 부조리에서 오는 고통) 즉,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므로 내가 그 고통을 느끼면 타인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그런 사회 공동의 도덕적 인식아래 타개책으로 필요한 생각이나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석가모니나 모든 성인들 또한 그들 자신의 위치에서 그들이 느낀 우리의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추고하고자 하는 것에 필요한 말을 했다고 밖에 생각되어 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 지는 알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을까?
중학교 때 한 노(老)선생님께서 누군가가 "왜 사냐?" 라고 묻거든,
대답 못하거나 또는 "혹시 하고요." 이렇게 대답할 바에는 차라리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기 위해서 삽니다." 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는 참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큰 뜻을 가지고 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말함으로써 내 생각이 바뀌어 질 수 있으니. 그리고 누군가가 물어 볼 때 마다 저리 말해서 정말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아니 타인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기다면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에는 살다가 보면, 내가 목숨걸고 해야할 일이 꼭 생길거라 믿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나에게 어떤 것에 대한 강렬한 신념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간다고 믿어며 스스로 위로를 한 것이다.
대학교 때에는 왜 이런 고민의 흔적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을까? 가장 최근의 일인데.
아마도 진전이 없어서 였을까? 그맇지 않으면 행복했나? ^^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모른다.
그러나 이전의 나와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바뀐 것 만은 사실이니 살아가는 방법도 미세하게라도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것은 삶에 대한 생각이나 의미가 점점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관계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쉽게 바뀔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뀌어 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삶일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 사춘기 소년의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나 목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존재할까?
어쨌든 적어도 나 하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났다.
혹시 내가 태어나야 했던 어떤 당위의 이유를 너무 오래되어 잊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태어남과 동시에 즉, 시ㆍ공간 속에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나는 의미가 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런 만남 속에서 내 의지의 작은 목표를 설정하면서 살아 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태어난 이유와는 무관하게 자연과 인간이라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것이다.
행복 또한 각 개인의 즉, 나 자신의 의식속에서 어떤 충만감으로서 존재하는 느낌일 뿐은 아닐까? 살아가는 동안 행복하면 좋겠다는 말은 성립될 수 있겠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 났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 또한 내가 태어난 이유는 아니다. 개,돼지 등 동물들도 어미로 부터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 그 것 들을 본다면, 내 이런 생각은 전혀 쓸모 없는 것은 아닐까?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유기체로서는 같은 존재들 일테니까! (동물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래! 어쩌면 이런 고민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장자나 플라톤은 무슨 생각으로 호접몽이니 이데아니 그런 말을 했을까? (지금이 꿈인지? 꿈이 진짜인지?,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말했으므로)
난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고.
우리는 분명 어쩔수 없이 현세에 내던져 있고, 그 안에서 생로병사(또는 현실의 부조리에서 오는 고통) 즉,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므로 내가 그 고통을 느끼면 타인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그런 사회 공동의 도덕적 인식아래 타개책으로 필요한 생각이나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석가모니나 모든 성인들 또한 그들 자신의 위치에서 그들이 느낀 우리의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추고하고자 하는 것에 필요한 말을 했다고 밖에 생각되어 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 지는 알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만약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않을까?
중학교 때 한 노(老)선생님께서 누군가가 "왜 사냐?" 라고 묻거든,
대답 못하거나 또는 "혹시 하고요." 이렇게 대답할 바에는 차라리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기 위해서 삽니다." 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는 참 멋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친구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큰 뜻을 가지고 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말함으로써 내 생각이 바뀌어 질 수 있으니. 그리고 누군가가 물어 볼 때 마다 저리 말해서 정말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아니 타인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생기다면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에는 살다가 보면, 내가 목숨걸고 해야할 일이 꼭 생길거라 믿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나에게 어떤 것에 대한 강렬한 신념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간다고 믿어며 스스로 위로를 한 것이다.
대학교 때에는 왜 이런 고민의 흔적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을까? 가장 최근의 일인데.
아마도 진전이 없어서 였을까? 그맇지 않으면 행복했나? ^^
그러면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모른다.
그러나 이전의 나와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바뀐 것 만은 사실이니 살아가는 방법도 미세하게라도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것은 삶에 대한 생각이나 의미가 점점 다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관계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쉽게 바뀔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뀌어 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삶일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