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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06 내가 본 황동규 시인

내가 본 황동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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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황동규 시인이라는 분을 뵙기 전까지 기대와 설레임 그리고 호기심으로 마음이 조금은 흥분된 상태였다. 한편으로는 괴팍스러운 노인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실 시인에 대한 어느정도의 편견도 있었지만 꽃의 고요 표지에 나오는 인상이 왠지 고독한 말년의 인상이 풍기어 고집스러워 보이는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에 대한 편견이라는 것은 왠지 시인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고 남들이 쉽게 지날칠 수 있는 것들에 관심을 보이는 면이 다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연이 시작하자 마자, 큰 소리로 "여러분! 황동규입니다. 편하게 하세요. 외투도 벗고~!"
사실 의외였다. 너무 친근한 동네 할아버지 같다.(지금 생각해 보면 악동같은 웃음도..)
'문학을 왜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 부터 강연은 시작되었다.
이 세상은 모두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라는 경제적 원리로 움직이지만, 문학은 최대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만족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경제적 원리는 세상에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적 원리만으로 세상이 돌아가면 인간은 인간이 아니게 될 것이다. 자원이고 하나의 물품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문학은 그런면에서 인간의 진실에 충실하다고 한다. 예로, 서부개척 시대 인디언 학살에 대한 찬미가 있는가! 또한 남북전쟁전 흑인노예제도를 찬미한 문학가가 있는가! (정치적, 경제적 등 타 분야에서는 서부개척,노예제도는 필요하다고 인정했다고 한다.)
문학은 너무나 경제적 원리만 따지는 이 시대에 그 반대적 역할도 필요한, 즉 인간의 본성에 충실할 역할로서의 한 줄기임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시 소개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
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
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
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이 시는 1956년 고등학교 3학년때 쓴 시이다. 김소월, 만해, 미당이
사랑의 노래를 불렀지만 너무 여성적이었기에 남성적인 시를 쓰고 싶었다고한다. 하지만 좋은 시는 남성적인, 여성적인 것이 모두 들어가 있는것이 좋다고 말한다. 놀랍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이미 화자는 알고있지 않은가! 삶의 진실을.. (제목 또한 즐거운 편지이다.)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순간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본연적인 모습은 감춘다고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아무리 뇌가 세상을 뇌화시키더라도 자연이라는 신체를 떠날수 없는 것처럼(유뇌론).
 
 
기항지 1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기항지 1' 이라는 시를 쓸 당시에는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비자나 여권등이 잘 나오지 않고 비행기도 귀한 시절이었기에 유일한 출구로는 항구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 탈출로서의 의미로 항구를 생각했기에 뱃머리가 모두 바다를 향해 있는 줄 알았단다. 하지만 배 있는 데로 내려가니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안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자유의 탈출에 대한 욕망이 순간 좌절과 절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하늘에는 자유가 있었는지 수삼개의 눈송이와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풍장 27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 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풍장은 보길도에서 실제로 봤다고 한다. 풍장은 위생적이지 않다고 하여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아마도 몰래한 것일 거라고 한다. 풍장은 시신을
땅에 매장하지 않고 땅위에 놓고 풀더미 등으로 쌓아 놓아 바람에 살이 날아가도록 한다음에 뼈만 남으면 다시 매장하는 풍습이라고 어디선가 본 것 같다. '풍장 27'이라는 시는 죽음쪽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한다. 그러면 삶은 더욱 절실해 지기 때문에 이 시는 죽음의 시가 아니라 삶의 시라는 것이다.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 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죽어도 삶을 떠날 수 없다는 아주 강력한 삶의 애착이 느껴진다. 전율로몸서리쳐지며 왠지모를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은 무엇인가?
 
 
보통법신(普通法身)
 
'그대의 산상 수훈(山上垂訓)과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른가?'
나무들이 수척해져가는 비로전 앞에서 불타가 묻자 예수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의 답은 이렇네. 마음이 가난한 자와 청정 법신이 무엇이 다르지 않
은가?'
비로자나불이 빙긋 웃고 있는 절집 옆 약수대에
노랑나비 하나가 몇 번 앉으려다 앉으려다 말고 날아갔다.
불타는 혼잣말인 듯 말했다.
'청정 법신보다
며칠 전 혼자 나에게 와서 뭔가 빌려다
빌려다 한마디 못하고 간 보통 법신 하나가
더 눈에 밟히네.'
무엇인가 물으려다 말고 예수는 혼잣말을 했다.
'저 바다 속 캄캄한 어둠속에 사는 심해어들은
저마다 자기 불빛을 가지고 있지.'
어디선가 노란 낙엽 한 장이 날아와 공중에서 잠시
떠돌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빌려다 빌려다 한마디 못하고 간 보통 법신 하나가 더 눈에 밟히네'
'저~ 사는 심해어 들은 저마다 자기 불빛을 가지고 있지'
빌려다 차마 빌지 못하고 간 보통 법신이 눈에 더 밟힌다는 말과 심해어 들은 저마다 자기 불빛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 아무리 낮은 곳에 살아도
자기만의 색이 있다는 것이다. 누가 더 소중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소중
하다는 것이다.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에서' 등 몇개의 시를 더 소개하고 질답문의 시간을 가졌고 jazz house라는 곳에서 뒤풀이가 있었다.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에서' 이 시를 소개할 때 세마춤에 대한 이야기가 아주 인상 깊었다. 세마춤은 춤 그 자체가 기도라고 한다. 다른 기복신앙에 비해 얼마나 순수한가를 말하며 직접 몸짓으로 춤을 추며, 말로 "우리 아들 대학붙게 해주세요" 라고 할 수 없지 않느냐며 세마춤에 대한 순수성을 더욱 강조했다. (이것 때문에 오늘 하루종일 길을 걷다가도 실실 웃음이 나와 다른 사람이 미쳤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뒤풀이 장소에서 더욱 더 재미난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것을 들었다.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뒤풀이 장소에서 황동규 교수님은 장인순 소장님과 주로 대화를 했는데, 처음에는 시이야기(로버트 포르스트등), 그러다가 잠깐 경제이야기도 있었고 (기름값과 중국에 대한), 과학이야기(26차원의 세계,전자,원자력) 등이었다. '정말 멋있는 노인네다' 라고 말하면 혼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런식의 표현으로 말하고 싶다.
호프집에서 백세주를 사다가 술을 즐기는 모습에서,
소주는 이제 약하고 달아져 찌릿한게 없어 못먹겠다는 말에서,
내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덤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Stopping by Woods on a Snowy Evening
 
Whose woods are these I think I know.
His house is in the village though;
He will not see me stopping here
To watch his woods fill up with snow.
My little horse must think it queer
To stop without a farmhouse near
Between the woods and frozen lake
The darkest evening of the year.
He gives his harness bells a shake
To ask if there is some mistake.
The only other sound's the sweep
Of easy wind and downy flake.
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눈 오는 저녁 숲 가에 서서' 에서 눈내리는 멋진 숲의 광경을 보고 잠시 멈추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약속을 생각하고 다시 가야겠다는 화자를 싫어하는 모습에서
(한 30분 늦어면 어때~! 저렇게 아름다운 경치에서는 조금 늦을 수도 있는 거지!),
소주 알콜농도가 20.05% 인데 0.05도를 맞추기 위해서 돈이 얼마나 들어가겠느냐는 말에서
(+-2% 의 정도 차이가 있으면 어떻다고..),
아이와 같은 호기심과 순수한 마음을 엿볼 수있는 말에서(화톳불이 꺼졌다. 눈물 끓는 소리),
술 기운에 가끔 살짝 혀가 꼬이는 듯한 모습에서 등등등
너무 많은 장면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냥 인간적인 모습만이었다면 그저 그랬을 것이다. 유쾌하게 만드는 힘! 삶을 달관한 듯이 편하게 말하는, 지식의 승화로 앎이라는 기반이 자리잡힌 삶의 유희일까?
난 그런 모습에 좌절같은 조바심을 느꼈다. 나도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하고.
인생이 덤인데 어찌 삶이 즐겁고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공짜는 즐겁다^^;)
사실 아침에 버스타고 오면서 어제 저녁의 일을 되뇌이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나는 데로 메모지에 적기 시작했다. 메모를 보고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메모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황동규 교수님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과 장인순 소장님과의 대화(고수들의 대화)를 잘 표현하고 싶었는데.
쓰고 나니 괜히 글을 잘 못쓰고, 괜히 올려 혼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지만 뭐 어떻냐는 마음도 고개를 든다. 그럴 수도 있는거지!

아쉬운 것은 하루가 지나서야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는 것이다.
문학을 왜 하는가는 들었다. 하지만 지금 궁금한 것은
 
'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것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이다.
 
인간의 진실을, 인간 자체의 진실일 수도 있고, 자연에 부딪히는 인간들에 대한 진실 일 수 있는 그런 모든 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일까?
순간 드는 생각으로, 문학은 인간의 'The' 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정관사 'The'는 나와 항상 (특별한) 관계가 있지 않은가! (그 의자(The bench), 그 해변(The beach)...)
문학은 인간과는 뗄 수가 없으니까!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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