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천일지'에 해당되는 글 37건
- 2018.11.07 전통문화와 기천의 관계에 관한 소고 - 손우성 원장
전통문화와 기천의 관계에 관한 소고 - 손우성 원장
Ⅰ. 전통문화와 기천의 등장
지구상에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존재한다. 문화의 사전적 의미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정의되고 있다.
민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문화는 역사가 오래된 민족일수록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으로 후대에 전승되고 있다. 어느 한 민족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문화를 우리는 전통이라 말한다. 전통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하여 내려오는 사상ㆍ관습ㆍ행동 따위의 양식’이라 표현되어 있다.
기천이 세상에 알려진 시기는 70년대 초반이다. 이 시기는 중국 무술과 일본 무술이 판을 치고, 우리나라의 전통 무예는 그 존재조차 의심받던 시기이다. 우리의 전통무예라 하면 고작 택견 정도가 희미하게 그 명맥을 유지하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기천은 그 당시 무예계에서는 충격이었다. 중국 무술과 일본 무술과는 전혀 다른 무예였으며, 옛 문헌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던 전혀 새로운 무예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전승 과정도 소설과 같아 기천은 현대에 창작 되었으며, 당랑권을 베낀 무예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기천을 시험하였다. 작은 체구의 20대 초반나이에 보통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공을 소유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 당시 무예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에게는 시험의 대상이 되거나 의심을 받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서 속에 기천이라는 명칭은 언급되지 않는다. 단지 대양상인으로부터 전해지는 구전심수된 이야기를 통해서, 직접적인 기천수련을 통해서 우리의 전통수행법의 하나라고 인정하게 된다. 기천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허공에 글을 쓰는 것과 같은 기천의 몸짓 속에 환국 이래 1만년 이상 내려오면서 뼈 속에 각인된 우리민족만의 독특한 문화가 녹아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기천을 수련하면서 그동안 생각해 왔던 전통수행법으로서의 기천에 대한 개인적인 상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전통문화 속 기천의 자취
1. 기천과 음양오행
음양 사상은 음(陰)과 양(陽)의 소멸·성장·변화, 그리고 음양에서 파생된 오행(五行) 즉,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움직임으로 우주와 인간생활의 모든 현상과 생성소멸을 해석하는 사상이다. 음양오행은 한국적 우주관의 근원을 이루며 우리 민족의 사상적 원형의 바탕을 이룬다.
음양(陰陽)의 한자 풀이를 보면 그늘과 햇빛을 의미하지만 암수라는 의미와 결합하여 만물 생성원리로 자리 잡은 사상이다. 우주만물은 음양으로 구분된다.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다는 원리이다.
음: 땅, 달, 여자, 봄, 여름, 물, (-), 받아들임 등
양: 하늘, 해, 남자, 가을, 겨울, 불, (+), 밀어냄 등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음양오행 사상은 오랜 옛날부터 민족사상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 강서대묘의 벽화를 보자. 강서대묘는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이며 한동안 ‘사신도’로 유명한 고분이었으나, 최근에는 중앙의 황룡을 포함하여 ‘오신도’이라 정정하여 말 한다. 오신도는 중앙의 황룡을 중심으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등 오방위를 대표하는 신수(神獸)를 그린 것으로 고구려 시대에 이미 음양오행 사상이 일반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앙에 그려진 황룡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기 때문에 천체의 운행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운행한다고 생각하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서 황색이라 함은 중앙을 상징하는 색이다. 즉, 고구려는 스스로 하늘이 선택한 천자국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오행의 색과 방위 등에 대하여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강서대묘 오방신을 보면서 우리 민족의 음양오행 사상을 비롯하여 한민족의 천하관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방신의 황룡과 관련하여 가슴 아픈 여담 한마디만 하자. 황색은 중앙 토를 의미함을 우선 알아두자. 임금이 입는 일상복 중에 곤룡포라는 것이 있다. 고려의 왕은 황룡포를 입었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는 청룡포를 입었다. 고려국왕이 황룡포를 입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법통을 이어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조선 초기에 청룡포를 입었다는 것은 천자국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이다. 즉, 명나라로부터 조선이란 이름을 허락받고, 왕이 입는 황룡포를 포기하면서 청룡포를 입었다는 사실을 보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뿌리 깊게 내리게 됨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의 국왕은 황룡포를 입지 못하고 붉은색 계통의 곤룡포를 입다가 대한제국을 선포하신 고종황제에 이르러서 황룡포를 입게 된다.
가. 내가신장과 음양
기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내가신장 자세를 살펴보면서 기천 수련에 담긴 음양관계를 찾아보자.
먼저 내가신장의 이름을 살펴보면, 제일 처음 등장하는 태양(太陽)이라는 단어와 신장(神將)이라는 단어가 대비됨을 알 수 있다. 태양(太陽)은 양을 상징하고 신장(神將)은 음을 상징한다. 태양이 양인 것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지만 신장이 왜 음인지 수긍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장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자. 국어사전에 의하면 신장(神將)은 ‘귀신 가운데 사방의 잡귀나 악신을 몰아내는 무력(武力)을 맡은 장수신’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신장이란 귀신의 하나란 말이다. 이쯤 되면 신장(神將)이 음이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신장은 그 이름에서부터 음양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내가신장 수련시에 손의 위치를 통해 음양을 찾아보자. 기천 수련인들은 일반적으로 내가신장을 서면서 오른손을 위에, 왼손을 아래쪽에 위치하고 수련을 한다. 또한 여자는 오른손과 왼손의 위치를 반대로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왜 오른손을 위로 하고 왼손을 아래로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음양과 관계가 있다. 우선 하늘과 땅을 생각해보자. 하늘은 양이요, 땅은 음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즉 내가신장 자세는 음인 땅을 디디고 서서 양인 하늘의 기운을 받는 자세이다.
우리 조상들이 내가신장을 서면서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가장 잘 소통되게 하기 위해 손의 위치를 고민하셨다면 아마도 하늘이 양이고 땅이 음인 사실을 바탕으로 오른손이 음, 왼손이 양인 점에 착안하여 손의 위치를 정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좌측의 건전지 그림을 보자. 이렇게 놓으면 전지의 연결에서 직렬연결이 된다. 초등학교 시절에 조금만 수업에 집중하였다면 직렬연결과 병렬연결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늘의 기운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지의 직렬연결과 같이 손을 위치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늘은 양이요, 땅이 음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오른손이 음이고, 왼손이 양인 이유는 잘 납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왼손과 오른손의 음양관계, 남자와 여자의 음양관계를 안다면 내가신장시에 오른손을 위로 올리는 이유가 납득이 될 것이다.
나. 육합(六合)에 담긴 오행원리
기천수련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내가신장, 범도, 대도, 소도, 금계, 허공의 여섯가지 수련을 일컬어 육합이라 한다. 기천수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수련인 육합(六合)에서 육(六)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찾아보자. 숫자 육은 오행상으로 수(水)를 나타내며 방위로는 북쪽을 나타낸다.
배달국시절에 태호 복희씨가 천하(天河)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비친 그림을 보고 그렸다는 하도(河圖)를 보면 1~10까지 숫자가 상징하는 오행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육합의 육(六)이 수(水)를 의미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행에서 수(水)의 의미를 찾아보면 육합(六合)이 의미하는 것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행에서 수(水)가 상징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 몸의 70%가 물로 되어 있으며, 물이 없으면 살수 없다고 생각하면 쉽다. 따라서 육합(六合)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법(法)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육합(六合)은 기천수련의 가장 바탕이 되는 여섯가지 동작으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법(法), 구원의 법(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육합(六合)의 각 동작과 음양오행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육합(六合)을 수련할 때 대부분 내가신장, 범도, 대도, 소도, 금계독립, 허공의 순서로 수련한다. 이 순서는 오행의 상생관계인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순서와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내가신장은 음양(陰陽), 범도는 목(木), 대도는 화(火), 소도는 토(土), 금계독립은 금(金), 허공은 수(水)와 연결시킬 수 있다. 오행에 있어 상생(相生)관계를 생각해보면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금생수(金生水)로서 육합(六合)에서도 그러한 순서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범도 후에 소도를 선다하여 수련효과가 적은 것은 아니다. 단지 육합의 수련 동작과 오행을 연결하여 서로 상생관계로 수련하는 것이 오행의 이치에 알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육합(六合)수련을 오행과 연결시켜본다면 각각의 수련이 오장육부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허공을 많이 하면 신장과 방광기능을 강화한다든지, 소도를 많이 서면 비장과 위를 강화한다든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부와 오행과의 관계를 따로 공부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2. 기천과 천부경(天符經)
불교에는 불경이 있고, 크리스트교에는 성경이 있으며,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민족에게는 천부경이 있음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천부경은 문자가 없던 환국(桓國)시대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경(經)으로써 총81자로 구성되어 있다. 환웅 1세 거발환(서기전 3898-3805)이 천산(天山)에서 지상의 태백산 신시(神市)에 내려와 도읍하시고, 신지(神誌 : 神志)이던 혁덕을 시켜 구전으로 전해지던 천부경을 기록 보존하게 하시었다. 신지가 전자(篆字)로 빗돌에 새겨놓아 후대인들이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한문으로 번역하여 서첩(書帖)으로 꾸며 세상에 전한 것인데, 단기4250(서기 1917)년에 묘향산(妙香山)에서 수도 중이던 스님 계연수(桂延壽)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오래된 경전(經典)이다.
천부경이 세상에 나오게 된 과정과 민족의 경전이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으나, 어찌 되었건 우리민족의 최고(最古)의 경전임에 확고한 지지를 보내고 있는 입장이다. 기천도 또한 우리민족의 전통수행법이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천부경과 기천과의 작은 연결고리라도 찾고 싶다.
천부경은 무(無)에서 시작되는 우주변화의 원리에서부터 인간이 바로 자연이며, 우주라는 이야기로 연결되어 간다. 기천수련에서도 우주 변화의 원리를 역도수로서 설명하고 있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의 음파공을 생각해 보자.
‘기천 태양 역근 마법 내가신장 준비’
‘하나, 둘, 셋, 넷’ ‘지~’ ‘천~’ ‘합~’ ‘틀~’ ‘무~’
기천 수련 시작을 알리는 음파공의 뜻을 문주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풀이해 보자. 지 천 합 틀 무는 역도수로 구성되어 있다. 무(無)에서부터 생각해보면, 무(無)에서 음양(틀)이 생겨나고 음양이 합(合)하여 하늘(天)과 땅(地)이 형성되었으며, 동서남북 사방이 생겨났으니 그 속에 인간이 자연과 하나 된다는 뜻으로 풀이 된다. 즉 기천의 시작을 알리는 음파공에서 우리는 천부경과 같은 우주변화의 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천부경과 관련한 본인의 자유로운 상상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우선 아래에 써져 있는 천부경의 중간부분에 있는 구절을 살펴보자. 본인의 상상과 관련하여 천부경의 일부분을 발췌하였다. 아래에 써있는 천부경의 일부만 발췌해서 읽어보면 무언가 느낌이 올 것이다. 느낌이 오지 않는가?
‘無 櫃 化 三 天 二 三 地 二 三’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직도 스치는 것이 없다면 발췌한 구절에서 숫자만 제거하고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이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도 모르면 뒤에서부터 읽어보자.
‘無 櫃 化 天 地 ’ → ‘ 地 天 化 櫃 無’
우리가 수련을 시작할 때 외치는 말과 비교하면 ‘화→합, 궤→틀’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원래 ‘화→합’을 살펴보자. 화(化)라는 것과 합(合)이라 하는 것은 발음뿐만이 아니라 그 의미도 비슷하여 혼용되어 사용되었을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기천이 구전되는 과정에서 원래 화(化)이던 것이 합(合)으로 잘못 전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으로‘궤→틀’을 살펴보자. ‘틀’대신에 ‘궤’를 넣어 천부경에 있는 그대로를 읽어보자. ‘지 천 화 궤 무’
‘궤’부분에서 매끄럽지 않은 느낌을 준다. 따라서 ‘궤’대신에 순 우리말인 틀이라는 글자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즉, 한자의 ‘궤(櫃)’와 한글의‘틀’은 그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역으로 기천수련시 음파공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자.
‘지 천 합 틀 무’
‘틀’을 제외한 모든 글자는 한자표기로 되어 있다. 모두 한자표기로 하든지, 아니면 모두 한글표기로 하였어야 할텐데 ‘틀’이라는 글자만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천부경의 우주변화 원리를 기천 수련과 접목시키는 과정에서 한자의‘궤(軌)’를 같은 의미를 가진‘틀’로 바꾸어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또한 ‘틀’이라는 구령에서 수련하는 사람은 손바닥을 마주하고 좌우로 비비는 즉, 좌우로 트는 동작을 한다. 그렇다면‘틀’이라 순 우리말이 기천 수련의 구령으로서도 동작을 나타내는 말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기천수련의 시작을 알리는 음파공인‘지, 천, 합, 틀, 무’라는 구령과 천부경과의 관계는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천부경에 나타난 우주변화의 원리와‘지, 천, 합, 틀, 무’에 담긴 우주변화의 원리(역도수로 표현되는)가 일치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우주사상이 천부경뿐만 아니라 기천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3. 기천과 허리띠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련되어지고 있는 많은 무예들이 허리에 띠를 맨다. 기천도 마찬가지로 허리에 띠를 매고 수련한다. 허리에 띠를 매는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강한 힘을 쓸 때 허리에 많은 부하가 걸리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강한 힘을 쓸 때 허리를 잡아줄 수 있는 띠가 있다면 허리 부상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운동으로 역도가 있다. 역도선수의 대부분은 허리에 띠를 두른다. 이는 허리부상을 예방함과 동시에 좀더 강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수련하는 사람들의 품계를 구분짓기 위해서이다. 태권도, 해동검도 등의 무예 단체에서는 처음 입문하는 사람은 흰띠를 매고, 노란띠, 초록띠, 파랑띠 등등의 급별 품계를 구분 짓는 띠를 매다가 일정수준에 오르게 되면 검은띠를 매게 된다.
셋째로는 무기를 소지하는 차원에서 띠를 매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검도가 있다. 허리에 띠를 매면 검을 허리에 차고 다닐 수가 있게 되며 유사시에는 빠른 발도술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밖에는 바지의 흘러내림을 막기 위해 허리띠를 매는 것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인지라 별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다.
기천수련시 허리띠를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의 세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해서 생각해 본다면 누구든지 기천수련시 띠를 매는 이유를 나름대로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먼저 여러 무술단체에서 허리띠를 매는 모습을 살펴보자.
사진속의 허리띠를 살펴보자. 현대의 대부분의 무예수련 단체에서 띠를 매는 모습을 보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다. 대표적으로 태권도, 합기도, 해동검도에서는 허리에 띠를 매고 수련한다. 검은띠가 되기 전까지는 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며, 검은띠가 되면 일정한 수준에 오른 사람임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아울러 해동검도에서는 검을 허리에 찰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 조상들도 무예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허리에 띠를 매고 수련하였다. 다음의 사진들을 살펴보자.
위의 사진은 고려의 무인상 모습이다. 고려시대의 무인상을 보면 허리에 띠를 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허리에 검을 차는 용도로 띠를 매었다는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인들은 순간적으로 강한힘을 써야할 때가 많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맴으로써 순간적으로 강한 힘을 발휘할 때 허리를 보호하고, 단전의 힘을 이용하기 용이하게 띠를 맸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사진들을 비교해보면 띠를 맨다는 측면에서는 모두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으나, 현대의 무술단체에서 띠를 매는 방법과 고려시대 무인상에서 띠를 매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무술단체에서는 매듭이 하복부의 정 중앙에 오게 되는데 고려시대 무인상을 보면 띠의 매듭이 좌우의 골반뼈 바로 위에 위치하게 된다.
기천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머리에 문득 스쳐가는 것이 있을 것이다. 기천도 허리에 띠를 매고 수련한다. 대양상인의 말씀을 빌자면, 원혜상인으로부터 수련지도를 받을 때 반드시 허리에 띠를 매게 하였다 한다. 띠가 없으면 칡넝쿨을 이용하여 허리에 띠를 매었다 한다. 기천의 띠 매는 방법은 일반 무술단체와 확연히 다르다. 기천은 고려 무인상의 허리띠 매는 법과 같이 좌우 골반뼈 바로 위에 매듭을 짓고 있다. 이는 기천이 최소한 고려시대 이전부터 우리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무예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역사적 사실과 결부하여 생각해보자. 삼국시대부터 무예가 중요시 되던 시기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여러 가지 행사에서 무예관련 행사가 빠지지 않았으며 무예수련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행해졌던 시기이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사병제도가 활성화 되어 있던 시기이다. 하지만 조선에 들어오면서 무예는 하향길을 걷게 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무장 출신이었으나, 자신이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왕위에 오른 사실 때문에 왕권의 강화를 위해 사병을 혁파하고 무예수련을 통제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유추해보면 고려시대까지는 드러내 놓고 무예를 수련할 수 있었으나,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무예수련은 산중으로 숨어들게 되었을 것이다. 기천은 산중무술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무인상과 결부하여 생각해보면 고려시대까지 일반적으로 수련되어오던 민족의 수련법이 조선시대에 산중으로 숨어들면서 면면히 그 맥을 이어와 오늘에 이르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Ⅲ. 민족의 자부심 기천
기천이 처음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낼 때 아무런 이름도 없었다 한다. 기천을 수련하는 사람을 그저 민족의 지킴이라 일컬어 왔으며, 기천은 치신의 법, 구원의 법,산중수행법 등으로 불리었다. 대양상인의 말 속에서 기천을 보자.
푸른 것과 같고 아늑한 것과 같으며(道)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큰 근원이 비어 있으며(無)
그것을 있다고 말하자니 형체가 없고, 그것이 없다고 말하자니
만물이 의지하여 태어난다.(有)
이것을 이름하여 氣天이라 한다.
이름도 형체도 없는 것을 이름하여 ‘기천’이라 한다는 말이다. 즉 기천은 민족의 몸짓을 간직하고 특별한 이름도 없이 산중에서 도제 형식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전통 수행법인 것이다.
한때 기천에 대하여 말들이 무성하던 시절이 있었다. 2000년대 초반이다. 마르스라는 잡지에서 기천은 당랑권을 베낀 무술이라고 하면서 몇 가지 정지동작 사진을 예로 들면서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잡지의 영향으로 기천은 한 때 기천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당랑권을 베낀 무술이라는 눈총을 받아야 했다. 이는 기천을 제대로 수련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단순히 정지동작 사진 몇 장의 자세가 당랑권과 비슷하다하여 잡지에 기사화 하였던 사건이다. 지금은 많은 무도인들이 기천의 우수성을 알고 있으며, 기천은 내공을 강하게 길러줌과 동시에 파괴력이 있는 무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 우리주변에는 요가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수행법, 건강법들이 거대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에는 수행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작금의 세태 속에서 기천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기천은 우리민족 전통의 사상을 간직하고 말이나 글이 아닌 몸짓으로 대대손손 내려온 고귀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위에 열거한 기천에 담긴 음양오행, 천부경과의 관계, 허리띠 매는 법 뿐만 아니라 고구려 무용총 고분벽화에 나타난 ‘수박도’의 모습과 기천 ‘범도’의 모습, 삼실총 ‘역사도’의 ‘역근’과 뒤꿈치 들고 있는 모습, 삼수발차기와 농악의 상모돌리기, 탈춤에 나타나는 ‘금계화장’ 동작, 전통춤 동작과 기천의 ‘수수화영’ 등 한민족의 전통문화 속에서 기천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한민족의 얼과 혼, 사상을 품고 있는 기천. 이름도 없이 산중에서 면면이 그 맥을 이어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한민족의 선도 문화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1675년(숙종 2) 북애노인이 쓴『규원사화』에서 “중국의 도교는 우리 선도문화의 찌꺼기”라고 갈파한 바 있다. 신선의 선도는 동이의 조선에서 발생했다는 말이다. 시인 조지훈도 젊은 시절의 한 논문에서 “중국의 도교 즉 선(仙)교류의 태반이 우리의 동이계 사상이었던 듯 함으로 우리 선교의 바탕이요 그것이 나아가서 중국의 선교(도교)가 되어 다시 들어온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해보면 기천은 한민족 선도 수행법의 일종으로서 그 뿌리가 단군시대의 산신사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기천이 70년도에 이름도 없이 혜성처럼 세간에 나타나면서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으나, 분명한 것은 우리민족의 선도 사상을 담고 있는 민족 전통 선도 수행법이자 전통 문화라는 것이다.
민족선도의 지킴이의 한사람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
|